[회오리바람], 난 너무 늙어버렸다 보고쓰기


 

 가끔 중학생 시절 내 일기를 읽으면
뭐가 그리 세상에 불만이 많은지 거침이 없다.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라고 손이 가는 대로 마음이 말하는 대로 끄적여놓은 그 일기장을 볼 때면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에 왜 그리 분노하고 불평하고 억울해했었는지 설익은 그 모습에 피식- 웃음이 나온다. 
 <회오리바람>은 바로 그 느낌이었다. 중학교 때 혹은 고등학교 때 썼던 내 일기장을 다시 읽는 느낌. 주인공들이 겪을 그 숨막히는 상황에 감정이입이 되면서도 동시에 '지나 보면 별거 아니란다' 피식- 늙은이 흉내내며 웃게 되는 그런 느낌. 

 중고등학교 때 난 모범생이었다. 대학욕심도 있었고, 엄마 아빠를 실망시켜서는 안된다는 장녀로서의 비장함도 있었다. 이유없는 반항을 일삼는 아이들을 싫어했고, 껄렁껄렁 거리는 아이들과는 그닥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. 수련회 가서 몰래 숨겨온 술 마시는 정도가 반항의 전부였을 뿐 이었다.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속에 들끓던 그 열망들이 기억난다. 나도 영화 속 이 아이들 마음 속의 그 끓어오르던 그것이 분명 있었다.
 나에겐 지금 중요한 건 공부가 아니라 우리 반 프리챌 커뮤니티에 답글을 다는 건데, 내가 좋아하는 그 아이가 다른 여자아이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나는 학원을 갈 기분이 아닌데, 수업을 들을 가치가 없는 선생님 수업에 떠드는 건 나의 정당한 거부의사일 뿐인데 왜 엄마는, 선생님은, 아빠는 그것도 이해를 못해주나. 도대체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어. 이해가 안돼.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이던 시절. 내가 생각한 나만의 기준은 모두 설익었다 철없다 인정조차 받지 못하던 그 때. 열여덟, 우리는 모두 똑같은 것을 겪고 있었나보다. 미정이도 태훈이도 나도.



 영화를 보는 내내 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미정이, 태훈이의 그 심정 뿐 아니라 그 아이들의 부모님, 주변 어른들도 모두 이해가 가가기 시작한 내 모습이었다. 이렇게 사람은 무언가 이해를 하게 되면서 어른이 되는 것이구나. '그래 그럴 수 있지, 원래 세상은 다 그런거야, 어른들 말씀 틀린 거 없더라' 자꾸만 세상을 이해하고 수긍하고 타협하면서 우리는 어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. 특히 미정이 아버지의 행동은 정말 또라이 같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해가 갔다. 아니,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. 둘을 떼어놓으려는 부모님들도 이해가 갔다. 온전히 태훈이의 편일 수만 없는 내 자신을 보며 난 마음만은 아직 10대라고 생각했는데 그새 세상이 날 이렇게 늙어버리게 했구나 새삼 한탄스러웠다.


 영화의 결정적 매력은 빈 구석, 흔히 말하는 '여백'에 있었다. 로맨틱 코미디에 나올 법한 열마디의 달콤한 대사보다 태훈이의 "내가 잘할께"가 더 애달팠고, 멜로 영화에서 흔히 쓰이는 백가지 설정보다 태훈이의 "나 앞으로 계속 만나줄꺼야?"가 더 와닿았다. 특히 바닷가 여행 회상씬들을 하나같이 정말 예뻐서 마음이 저릿저릿 했는데 그건 화면이 이쁘고 대사가 이쁜 걸 떠나서 우리가 애틋했던 추억을 떠올릴 때 딱 그정도로 미화되어 있어서 그래서 더 예뻤다. 


 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리고, 잃을 것도 너무 많아져버린 지금의 난 가끔 사춘기가 그립다. 아무것도 모르기에, 그리고 이해할 수 없기에 오로지 나의 감정과 열망에 충실해 앞으로 돌진할 수 있었던 그 시절. 지금의 난 그런 힘은 잃은 채 사춘기 시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세상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. 세상은 원래 이래. 네가 받아들이기 힘든 그런 거 사실은 별거 아니란다. 덜익어 떫은 모습 자체로 돌진해나가던 태훈이를 보며 계속 속으로 타이르고 있던 나는 아무래도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. 간섭도 구속도 없어서 내 마음대로 모든 걸 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어른이 되었지만 정작 어른이 되어보니 스스로를 가둬놓고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내가 나를 간섭하고 구속하게 된 것이다.



 참, 그나저나 영어 제목은 Eighteen이던데 왠지 한국어 제목도 <회오리바람>대신 (회오리 바람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) 열여덟이라고 했으면 18로 읽었을 때 욕도 되면서 이중적으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. <십팔 열여덟> 뭔가 욕하는 것 같으면서도 18살의 그 시절을 상징화할 수 있는 제목처럼 보이지 않나? ㅋㅋ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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